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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One™ Universe하나의 세계관을 만들기로 했다.

Ten:One™
2022-06-29
조회수 378

2019년 10월,  40대 중반을 넘어서던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대학생 때와 사회 초년생 때 쓰던 플래너와 메모장들을 집어 들었다. 당시 고민과 아이디어들이 눈에 들어 왔다. 피식거릴 만큼 조잡한 것도 있고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것들도 있었다. 어설픈 계획들과 아이디어들을 보면서 그래 그땐 그랬지 하는 생각과 당시에 만들고 운영했던 커뮤니티나 사이트를 지금까지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사라져 아깝다는 생각도 밀려 올라 왔다.


다풍모(다음 풍물패 모임), 브랜드 공작소, 브랜드 타임즈, 브랜드 DB, 브랜드 리뷰, 트렌드 헌터, 오피니언스 , 몬츠(어글리 캐릭터 모델 에이전시) 등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은 공대를 졸업 후 브랜드 컨설팅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PC통신 하이텔에 접속하던 사람이 군대를 제대하고 보니 인터넷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나마 행정병이라 PC를 계속 사용했기에 사회에 나와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군에 가기 전 학교에서 풍물패 활동을 했는데 제대를 하고 풍물패 활동도 지속했다. 그러다 학교 친구들도 좋지만 다른 학교, 다른 지역 사람들과 같이 풍물을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 만든 커뮤니티가 다풍모(다음 풍물패 모임)였다. 당시는 다음과 네이버에서 카페라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시작한 초창기였고 다음이 먼저 시작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카페를 만들었다. 가장 큰 풍물패 까페가 되었다. 전국에서 풍물을 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한 달에 한번 정모(정기모임)를 했다. PC통신 시절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시삽(Sysop)이 카페주인이라는 개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학교 생활도 병행 하다 보니 버겁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도해서 조직을 운영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의 인생 반려자도 다풍모에서 만났으니 나에게는 분명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준 활동이었다.


공대 졸업반이었던 나는 일본에 있는 독특한 직업이나 돈벌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이규형)'라는 책에서 네이미스트라는 직업을 알게 된다. 눈에 확 꽂힌 것이다. 고등학생 때 이과였지만 문예부 활동을 했다. 수능 끝나고 졸업을 앞둔 무지랭이 고딩이 언론사 신춘 문예에 응모하기도 하고, MBC 베스트 극장에 극본 공모도 했다. 말장난이나 단어 조합을 즐겨 하던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이미스트라는 직업을 검색해 보니 사람 이름 짓는 일과 브랜드 네임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브랜드 네임을 만드는 일이 더 근사해 보였다. 네이밍에서 브랜드로 관심사가 확대된 나는 코딩을 공부하던 동기들과는 다른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브랜드 네임을 만드는 회사들이 있었다. 메타브랜딩이라는 회사였다. 바로 네이미스트로 입사 지원을 했지만 떨어졌다. 이유는 아무런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날 바로 브랜드 공작소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이 역시 관련 커뮤니티 중에는 가장 큰 커뮤니티가 되었다. 


브랜드 관련 스터디도 진행하고 정기 모임을 했다. 그러던 중 아모레 퍼시픽 (당시 태평양)에서 연락이 왔다. 라네즈라는 브랜드의 프로덕트(제품) 네임을 개발하는데 대학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아 보고 싶다고 했다. 운영자 3명 모두 학생이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초 화장품 45개, 색조 화장품 47개였다. 제품당 네임 후보가 10개 이상이었으니 실로 엄청난 작업을 한 것이었다. 우리는 열정을 갈아 넣었다. 우리에게 일을 준 당시 담당자분이 제안된 네임들에 피드백을 주는 자리에서 너무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고 몇몇 네임은 전류(상표법상 존재하는 전체 분류)에 출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아르바이트 비용 수준의 돈을 받았다. 우리 스스로 해낸 첫 프로젝트라는 생각에 너무 좋았다. 당시에는 그 의미와 비즈니스적 가치를 몰랐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이나영이라는 배우가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치는 라네즈 광고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만든 네임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알게 되었을 때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TV, 신문, 버스 정류장, 높은 건물의 대형 전광판 까지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 그 브랜드를 볼 수 있었다. 매번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몸에서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브랜드라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졸업을 앞두고 전과나 다시 대학을 알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더 해 보니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전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 한번 들어 본 경영대 교수님을 찾아가 상담했다. 당황하셨다. 수업 한 번 들어 인연이 있는 공대생이 대학원도 전공이 아닌 곳으로 간다고 하니 그럴 수 밖에, 업계에 있는 선배들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연락을 취했다. 흔쾌히 만나주었다. 그분도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우여곡절 끝에 취업대신 경영대학원에 진항하게 되었다. 그곳은 직장인이 주로 다니는 특수 대학원이라 야간에 수업을 했다. 대학원에는 이미 사회에서 마케팅이나 브랜딩 일을 하고 계신 선배님들과 동기이지만 형, 누나들이 전부였다. 그렇다 나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그것도 비전공자, 비관련자였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수업 끝나고 거나하게 술자리가 이어졌다. 수업 시간에 듣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대학원은 경영컨설팅학과 내에 브랜드 매니지먼트 전공이라서 경영과 마케팅, 브랜드와 컨설팅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술자리에서는 선배 형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취업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고 수익도 없던 나는 부모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고민 속에 살던 중에 나를 좋게 봐주신 형 한 분이 의료 컨설팅 회사를 세팅하고 있는데 같이 하자고 하셨다. 쌩 초보인 나에게 소비자 조사와 컨설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원 선배 형, 누나들이 브랜드 컨설팅 회사를 차린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브랜딩 코리아라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회사는 브랜드 업계의 교육과 전문 필진으로 운영되는 매거진과 커뮤니티 기능이 있는 회사였다. 나는 CI, BI, 네이밍 등 업무를 배우고 프로젝트에도 투입이 되었고 브랜딩 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브랜드 컨설팅이나 네이밍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브랜드라는 것이 탄생할 때 부터 기업의 미션과 비전이 녹아 있는 정신적, 인식적 체계라고 배운 나인데 그것이 실제로 소비자와 만나는 광고라는 것에서는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막연하게 광고대행사에 가서 제대로 된 브랜딩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광고대행사에 무작정 지원을 했다. Lee & DDB라는 회사였다. 유명한 광고 기획자(AE) 이용찬 대표님과 글로벌 광고 대행사인 DDB가 함께 만든 회사였다.  그리고 나를 면접 보신 이우철 형님도 브랜딩 회사 출신이셨다. 그런 것들이 인연이 되어 광고 대행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광고 대행사에 다니고 있다.


브랜딩 코리아에서 Lee & DDB로 옮겨 오는 시점에 만든 커뮤니티와 사이트가 브랜드 관련한 브랜드 타임즈, 브랜디 DB, 브랜드 리뷰였다.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하게 되면서 트렌드 헌터라는 사이트와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었다. 어설프지만 업력이 쌓이게 되면서 뭔가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겠다며 오피니언스라는 컬럼 사이트를 만들고 광고 콘텐츠를 만들면서 뭔가 독특한 모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어글리 캐릭터 모델을 모을 수 있는 몬츠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사회 초년생에서 대리가 되던 시절이라 정말 바쁜 일상을 살아야 했다. 만들어 놓은 사이트에 컨텐츠를 올리기에 능력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사이트들도 사라졌고 등록된 상표들도 도메인도 시간이 지나 말소가 되었다. 


만약이지만 그 때 했던 것들을 지금까지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생각과 경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직접 플래너를 만들어 뭔가를 정리하던 경험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이고 언제 또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이 생각들을 브랜드화 하고 메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공개적으로 하나씩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실현이 되든 안되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 골프 치고 다닐 나이에 나는 나의 관심사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세상에 꺼내는 것을 취미로 삼기로 했다.


취미 생활의 시작으로 Ten:One™이라는 개인 브랜드와 tenone.biz라는 사이트를 만들게 되었다. 그동안 세상에서 사라진 관심사들을 텐원에 하나 씩 장착하기 시작 했다. 


함께 일할 팀원을 뽑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내 주변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계에서 사람을 구하는 방식은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시켜줘"였다. 팀원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부탁을 해 보지만 돌아 오는 답변은 "나 먼저 구해줘."였다. 이제 내 연차에 업계에 남아 있는 사람도 많이 줄었을 뿐더러 주니어급 인재들과는 연결 고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직접 팀원을 구해 보겠다며 카카오톡에 오픈 채팅방을 만들게 되었다. 너무 짧은 시간에 1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방이 되었다. 만들어진 방을 통해 이력서도 많이 받았고 인원을 뽑는데 성공했다. 그러고 말 뻔 했는데 나름 큰 대행사에 있으면서 몰랐던 저연차 후배들의 희노애락과 다른 군소 대행사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광고 대행 업계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평소 업계(바닥) 사람들을 엮는 커뮤니티와 광고 대행사 일만 하다 보니 편협해지고 한 가지 방향으로 매립되고 있는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밥은 먹고 다니니", "세알시(세상을 알아가는 시간)", "형 어디가" 등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성향의 사람인가 보다. 그런 성향을 닮은 딸 아이들을 보면 가끔 묘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기왕에 만든 채팅방을 활성화 하기로 했다. 업계에 대한 자그마한 소명감도 작용을 했다. 브랜드도 바닥(Badak)이라고 너무 쉽게 결정해 버렸다. 스터디 모임도 만들었다. 이력서 코칭도 했다. 업계에 필요한 이직 정보 외에도 레퍼런스나 디지털 마케팅 관련 방들을 만들게 되었다. 채팅방 안에 멤버들이 자발적으로 관심사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다. 방이 너무 많아 지면서 이것을 담을 수 있는 허브 역할을 할 사이트(Badak.biz)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케팅&광고 대학생 연합 동아리 매드립(MADLeap)을 만들게 되었다.  비즈니스 네트워크 domo, 창업 동아리 CHANGe UP....  더 많은 일들을 벌리게 될거 같다.  


생각나면 바로 해보는 스타일인 듯 하다. 바로 바로 저질러 본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어디까지 벌리게 될지 두렵기 까지 하다.

처음 텐원이라는 사이트를 만들면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나도 겁날 정도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서로 시너지가 날 수 있게 잘 엮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늘도 열심히 Ten:One™ Universe를 만들고 있다. 


https://www.tenone.biz 


난, 늘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남자는 당연히 이과를 가야 하는 줄 알고 이과를 선택했지만 문예부 활동에 심취했다. 대학생 때 산업공학을 전공한 공대생이었지만 수학과 친하지 않았고 전공 수업은 필수 과목만 겨우 패스하고 문헌정보학과나 경영학과 수업을 찾아 듣고 동아리도 풍물패를 했다. 군대도 휴전선 최전방에 갔지만 전경으로 차출 되었고 데모를 막을 줄 알았는데 행정병이 되었다. 공장 설계나 코딩을 공부해야 하는 공대생이 브랜드 매니지먼트로 대학원을 가고, 의료 컨설팅,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광고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고 광고 대행사 특유의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열정 보다는 디지털이나 BTL(대형 행사)에 관심을 갖고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IMC)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몇 번 이직을 했다.

지금도 난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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